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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읍 수산 초등학교에 가면 진안할망당이 있다. 본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는 서쪽으로는 표선면 성읍리 일부,
남쪽으로는 난산리와 온평리,
북쪽으로는 시흥리와 구좌읍 일부를 접하며
바다가 없는 중산간 마을이다.
수산리라는 명칭은 17세기부터
수산리와 흘전촌으로 구분되었는데,
수산리[지금의 수산1리]의 옛 이름은
‘물미’로, ‘믈미, 믈메’[지금 대수산봉]라는
오름 북서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흘전촌[지금의 수산2리]의 옛 이름은
‘홀앏’, ‘홀앞’ 또는 ‘곶앏’, ‘곶앞’으로,
‘덤불 숲의 앞’이라는 뜻이다.
성산읍 수산리의 역사
수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 시대 수산평 일대에 말과 양 등을
방목하였다는 기록에 비추어 본격적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말~14세기 초로 추정한다.
수산리는 1416년(태종 16) 정의현이
설치될 때 정의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880년(고종 17) 정의현 좌면 수산리가 되었다.
1946년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수산1리, 수산2리가 되었고,
1980년 성산면이 성산읍으로 승격되어
성산읍 수산리가 되었다. 2
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남제주군이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 동동·서동·중동·하천동이 있다.
수산진성과 진안할망당
수산초등학교 안을 들어서면
예쁜 교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학교 주변을 빙 둘러보면 마치
견고한 철옹성처럼 높이 쌓인 돌담벽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벽이 수산진성이다.
수산진성은 세종 21년에 방어를 위해
수산성을 쌓고 수산진을 둔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이 수산진성은 제주에 쌓여진 다른 성과 다르게
수산초등학교의 교정을 빙 둘러있는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왜냐하면, 수산진성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초등학교 교정이라는 현재와 연결시켜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마음을 쓴
수산리 주민들의 노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수산진성에는 수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진안할망당도 볼 수 있는데
진안할망당과 관련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수산성을 쌓기 위해 각 집에서 부역을 차출했는데,
수산리에 살고 있던 과부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역을 할 처지도 무엇을 낼 처지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과부가 말하길 “저는 무척이나 가난하여,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딸 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수산진성의 터가 그 이야기를 듣고 노했는지
성을 쌓을때마다 자꾸 성이 무너져 사람들이 심히 걱정을 했다.
근데 마침 지나가던 한 중이
“열세 살 된 원숭이띠 소녀를 땅에 묻고
그 위에 성을 쌓으면 된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 과부의 딸을 희생물로 삼아 성을 쌓자
성이 무너지지 않고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성이 완성된 뒤 그 진성주변에서
의문의 여자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을 주민들은 이 울음소리가 수산진성을 쌓기 위해
희생된 여자아이의 억울한 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에 요청하여 마을 주민들은
이 여자아이의 억울한 혼을 달래기 위해
그 소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고
당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당이 진안할망당이 되었다.“
이 당의 제단 속에는
그 여자아이가 생전에 사용했던 거울 등
물건들을 상자에 놓고 함께 묻혀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 이 당은 수산리 주민들의 적극적인 움직임 덕분에
현재와 과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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